사진 l 프랑스 시민혁명을 위트있게 해석한 샤넬의 2015 S/S 컬렉션
힙합도 밀리터리도 놈코어도 아니고 ‘컨템포러리’ 패션 즉 ‘동시대적 스타일’이 패션의 키워드라니! 과연 컨템포러리 패션은 무엇일까요?
사진 l (왼쪽부터) 루이비통의 2014F/W 광고 캠페인 이미지. <아이콘의 재해석들>이라는 컨셉트로 브랜드의 정통성이 잘 드러나는 모노그램 컬렉션을 재해석했어요.
컨템포러리 패션을 잘 보여주는 브랜드 3.1 필립림의 양털 트리밍 슈즈.
컨템포러리 패션의 대표주자 아크네 스튜디오가 지난 2013년에 선보인 ‘로데오’ 컬렉션.
‘컨템포러리’라는 단어만큼 유연한 말을 들어보셨나요? ‘동시대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덕분에 지금 유행하는 모든 것을 그 범주 안에 묶어둘 수 있죠. 패션 역시 마찬가지에요. 라틴어 어원인 con(함께)과 tempus(시간)의 의미가 포함된 단어의 뜻처럼 ‘즉각적’이고 ‘동시대의 산물’적이며 ‘현대적인’ 패션이라는 애매한 답변만 주어질 뿐이에요. 사실 흔히들 컨템포러리 패션이라고 했을 때 ‘하이패션과 SPA 브랜드의 사이에 모호하게 껴있는 영 캐주얼 스타일의 신진 디자이너 옷’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편견이고요.
그렇다면 이를 다시 정의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거 같네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죠. “지금 우리가 가장 원하는 패션은 무엇인가요?”
지나치지 않은 패션
사진 l (위쪽부터)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장 필립 델롬의 일러스트로 표현된 당대의 크리에이터 모습.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창조한 ‘뉴 룩’과 2013년 라프시몬스가 재해석한 ‘뉴 룩’. 발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뉴 룩’은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동시대적인 패션이에요.
과하다 싶은 옷이 사랑 받던 때가 있었어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20세기 말의 패션을 보면 이해가 갈 거에요. 1980년대에는 어깨를 잔뜩 부풀리고 허리를 잘록하게 만들어 몸매를 과장시키는 옷이 유행했어요. 소재도 심하게 반짝이고, 색과 무늬는 강렬했죠. 1990년의 패션도 과장된 구석이 있었어요. 남자보다 더 남자처럼 보이는 딱딱한 정장을 입은 커트 머리 여성과 자기 몸보다 2~3배만 크면 다행이었던 헐렁한 힙합 바지를 입은 남성이 공존했죠. 2000년대 초반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많은 여성이 어깨를 잔뜩 부풀린 재킷을 입고 천근만근인 빅백을 든 채 계단처럼 청키한 굽이 달린 플랫폼 힐을 신고 거리를 위태롭게 걸었어요. 무엇이든 ‘과장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던 거죠!
사진 l (왼쪽부터) DKNY 14F/W 컬렉션. 런웨이가 현실적인 패션으로 채워졌어요.
DKNY 브랜드 로고가 프린팅 된 기본 스웨츠 셔츠.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심플한 디자인의 쿨한 스니커즈.
그런데 어느 순간 패션계에서 승승장구하던 ‘과함’의 바람이 쑥 빠졌어요. 현실과 하이 패션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처럼 보이던 런웨이는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처럼 눈에 익은 옷, 내가 가지고 있는 듯한 실용적이고 편한 옷으로 채워졌어요. 스웨트셔츠, 리브 조직이 드러난 스트링 팬츠, 아디다스와 뉴발란스 운동화, 버켄스탁, 캐주얼한 스냅백, 니트 모자, 종이 쇼핑백 같은 모양의 쇼퍼백 등이 인기를 모은 거죠. 사람들은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패션을 두고 ‘놈코어’라 칭하며 열광했어요. 트렌드를 따르지 않으려는 트렌드로, <뉴욕타임즈>는 “자신이 70억 인구 중 한 사람임을 깨닫는 사람의 패션”이라 정의하기도 했어요. 그동안 ‘과함’에 부대껴온 일종의 반작용이자 휴식과도 같았다고나 할까요? 이처럼 디자인은 평범하게, 디테일은 남다르게, 삶의 철학은 반영할 수 있게 만든 옷이야말로 현재의 우리가 열광하는 컨템포러리 패션이고, 지금 우리가 옷을 입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컨템포러리 패션의 스타 브랜드
사진 l (왼쪽부터) 2014 F/W 셀린느의 광고 캠페인.
셀린느를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로 만든 장본인,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
대표주자는 단연 ‘셀린느’에요. 아니 ‘피비 파일로가 만드는 셀린느’라고 하는 게 더욱 정확하겠네요. 그녀는 여심을 꿰뚫은 듯한 심미안으로 컨서버티브한 패션을 주로 선보여온 명품 브랜드 셀린느를 전세계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로 등극시켰어요. 헝클어진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오버사이즈 코트, 턱까지 가리는 터틀넥 니트, 헐렁한 울 팬츠를 걸치고 하얀 운동화 신은 채 둘둘 말아서 손에 아무렇게나 쥔 듯한 클러치 백을 들고 있는 셀린느 광고 캠페인 속 여성의 모습은 ‘컨템포러리란 이런 것이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했죠. 이처럼 정제되고 자연스러운 패션에 매료된 컨템포러리 우먼은 여름에는 버켄스탁을 신었고 가을에는 스웨트셔츠와 헐렁한 보이프렌드 진을 입었으며 지금은 박시한 코트를 입으며 겨울을 나고 있어요.
사진 l (왼쪽부터) 2013년 발표한 아크네 스튜디오와 포토그래퍼 윌리엄 웨그먼의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
배우 미하일 바리시니코가 등장한 아크네 페이퍼의 커버.
전세계적으로 스톡홀름 열풍을 일으킨 아크네 스튜디오는 또 어떤가요?
최근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컨템포러리브랜드 중 하나로, 1996년 스웨덴의 젊은이 4명이 필름,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에이전시를 만들었다가 그 중 한명인 조니 요한슨이 청바지를 제작해 지인에게 선물했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스웨덴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만한 패션 브랜드가 되었지요. 단순하면서도 쉬운 디자인, 구조적인 실루엣, 곳곳에 숨어있는 위트있는 디테일이 특징이에요. 패션 매거진 <아크네 페이퍼>를 발행하고 1인용 소파, 화병 등 독특한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아크네 스튜디오가 생산하는 모든 것으로 일상을 채우려는 이들 역시 많아 이른바 ‘아크네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죠.
사진 l 프로엔자 스쿨러의 디자이너 잭 맥컬로우와 라자르 헤르난데즈.
프로엔자 스쿨러 역시 빠질 수 없어요. 잭 맥컬로우와 라자르 헤르난데즈의 남성 듀오 디자이너가 2003년 론칭한 이 브랜드는 등장과 동시에 뉴욕의 CFDA(젊은 디자이너 육성을 위한 후원 프로그램)와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상 등을 거머쥐며 패션계를 휘어잡았는데, 건축적인 실루엣과 첨단 기술을 활용한 소재의 믹스 & 매치, 독특한 프린트와 색감이 인기 비결이에요. 영원히 소년처럼 보이는 이 젊고 쿨한 듀오 디자이너는 새로운 컬렉션을 준비할 때 과거의 아카이브 창고를 헤매는 대신 흥미로운 요소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등 ‘오늘’을 위한 디자인에 집중한다고 해요. 왜 그들의 옷이 이토록 동시대적인가, 이해가 가죠?
사진 l (왼쪽부터) 사카이의 2015 S/S 컬렉션.
사카이의 디자이너 아베 치토세.
사카이도 주목할 만해요. 니트, 레이스, 패딩, 퍼 등 이질적인 소재를 한데 섞어 베이식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의 옷을 주로 선보이는데요. (예를 들면 테일러드 팬츠에 허리 스트링을 달거나 울 코트 안에 패딩을 덧대는 식.) ‘흥미로우면서도 늘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다는 디자이너 아베 치토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봐야해요.
사진 l 하이더 아크만의 2015 S/S 컬렉션.
2010년 칼 라거펠트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샤넬의 가장 이상적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후계자’로 언급해 순식간에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하이더 아크만은 또 어떤가요!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가족에게 입양된 후 에티오피아와 알제리 등에서 한국계 남동생, 베트남계 여동생과 함께 자라온 남다른 그의 삶이 반영된 독창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컬렉션은 배우 틸다 스윈튼,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일본계 보석 디자이너 하루미 클로소프스카 드 롤라를 비롯한 전세계 여성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어요. 독특한 커팅과 어두운 컬러, 가늘고 긴 실루엣이 특징이죠.
사진 l 지난 F/W 알렉산더 왕의 광고 캠페인. 늘 스토리텔링이 있는 파격적인 비주얼을 선보여요.
반면 뉴욕의 알렉산더 왕은 신선하고 대중적인 패션을 선보이며 동시대의 아이콘이 됐어요. 스트리트 감성을 하이 패션에 적절히 녹여내 누구나 ‘입고 싶은’ 옷을 만들죠.
사진 l (왼쪽부터) 자크뮈스의 광고 캠페인은 자연스럽고, 느슨하고, 자유로운 이미지가 공존해요.
자크뮈스를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 사이먼 포르테.
최근에는 프랑스 브랜드 자크뮈스가 승승장구 중이에요. 아이돌보다 더 아이돌 같은 외모와 프렌치 감성을 두루 지닌 1990년생 디자이너 사이먼 포르테가 만드는 자크뮈스의 옷은 20~30대 젊은 여성을 완전히 매료시켰어요. ‘프랑스적이고 만사에 무관심한 태도를 지녔으며 일사에 매우 싫증이 나있는 젊은 여자’가 입는 옷을 만든다니. 얼마나 신선한가요?
컨템포러리 패션 아카이브
사진 l (왼쪽부터)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위치한 4N5 매장 전경.
사카이의 라이더 재킷, 쥬세페 자노티의 하이톱 스니커즈 등을 직접 만날 수 있어요.
컨템포러리 패션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다면 여러 브랜드가 한데 모여 있는 편집숍을 찾는 것이 편합니다. 신세계 백화점 신관 4층과 본관 5층을 연결한 문화 공간 ‘4N5’가 적절한 대안일 듯 해요. 아크네 스튜디오, 알렉산더 왕, 띠어리 등 40여 개의 국내외 컨템포러리 브랜드를 비롯해 분더샵의 세컨드 라인인 분더샵앤컴퍼니, 캐주얼 멀티숍 블루핏과 비이커가 숍인숍 매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컨템포러리 핸드백 컬렉션을 따로 구성해 쇼핑하기에도 좋고요. 동시대의 패션을 서로 공유하듯 다양한 브랜드를 믹스 & 매치해 디스플레이한 쇼윈도만 지나치며 봐도 무엇이 현재 우리가 원하는 옷 입기인지 실감할 수 있을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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